작가 노트
“작품의 목적은 모든 것이 모여서 하나를 정복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개념은 일본 애니메이션 < 이웃집 토토로 >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믿는 사람 눈에만 보인 다’
보이는 것조차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성장인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2000년도) 고1 때 과학 선생님 말에 웃으면서 말대꾸하던 나를 보고 말하셨다.
“처음 볼 때하고는 많이 변했네? 너 다대포 살지? 같은 동네 살아서 편하게 해줬더니 그렇게 기어오르고 말대꾸 하는 게 니들이 소위 말하는 "좀 컸다" 냐?”
난 오히려 그 반대였었다.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더 좋아했을 뿐이다. 선생님이기도 했지만 같은 동네사람이었고
일요일이면 대중목욕탕에서 한번 씩 마주쳤던 터라 난 더 친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던 선생님 이었지만 그런 행동이 오히려 나에게 비수가 되어서 가슴을 찔렀다.
- 그렇게 마음의 벽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머리에 젤도 바르고 손가방도 들고 수제화도 신으면서
그 시절에 나는 그렇게 성인을 흉내 내는 것들이 진짜 멋 인줄로만 알았다.
보수동 근처에 아폴로라는 대형 장난감 가게가 있었다.
나는 그때 애니메이션 다간에 나오는 스카이세이버라는 로봇을 너무 좋아해서 가지고 싶었지만 그때 장난감을 좋아하면 아직도 애라면서 놀려댈 친구들이 무서워서 사지 못했던 장난감.
그래서 모자를 푹 눌러 쓰며 가게 사장님에게
"제 사촌동생이 스카이세이버 사오라던데 어디 있나요" 라고 말했던 내가 아직도 기억난다.
마치 지금은 “내 친구가 그러던데” 하면서 내 속내를 남에게 물어보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지 않을까.
당연히 그 사장님은 내가 가지고 싶어서 사는걸 알았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던 해에 < 이웃집 토토로 >를 보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대학생이었던 당시 나는 그것은 너무 큰 충격 이었다.
‘보이는 것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인이 되어버린 나는 다시 코 흘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어릴 때는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다시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어릴 때 소중했던 기억들이 다시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잊고 지냈던 나의 레고들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릴 때 타고 놀던 목마가 생각났다.
겨울에는 추울까 목마에게 이불을 덮어줬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나는 장난감 상자 속으로 다이빙을 하는 다이버가 되어 버렸다.
집 앞 가로등 밑 벤치에서 엄마와 나는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빠를 기다리면서 밤하늘을 자주 보곤 했다. 그때 엄마는 나에게 별들의 속삭임이 들린다고 했었다.
“뭐라고 하는데? 뭐뭐뭐 뭔데 말해줘..”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대답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지만 ‘해 와 달’ 이야기는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 3학년 프레젠테이션 시간 이었다. 나름 예술에 있어서 모든 것을 열어 두셨던 교수님 수업이었다. 그래서 대학 생활 중 유일하게 수업시간이 기다려지는 수업이기도 했었다.
특히 미대 특성상 대부분 실기위주의 수업이라서 무엇인가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서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간 학교를 다니면서 동기, 선배, 교수님 들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었다면
그리고 반대되는 생각을 말하면 학교생활의 불이익이 두려워 말하지 못했었지만
그 시간은 오히려 솔직함이 플러스요인이 되어 돌아오는 시간이어서 쌓였던 울분을 토하는 기분으로 발표를 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정중하고 나이스 한 모습이어야 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하지만 결국 완성에 가까워 질 때 느끼는 희열은 동일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 완성을 위해서 작업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는 가장 원초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결국 궁극의 목적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올랐을 때의 그 느낌,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면서 다가오는 희열이다.
내 작품에 등장하는 패턴이나 도형 색깔들은 새로운 것은 없다.
그저 가장 원초적인 것들의 변형일 뿐이다.
가장 그리기 힘들었던 것은 동그라미였다. 별은 잘 그렸지만 항상 한쪽으로 기울어졌었고
정삼각형과 정사각형을 쉽게 잘 그렸었던 것 같다.
밝고 선명한 색은 크레파스에서 따온 것이다.
새 크레파스를 개봉 했을 때는 예쁜 스틱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오히려 새로 샀던 크레파스가 닳은 모습이 싫어서 계속 쓰던 크레파스만 썼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이유로 목마를 그리고 있다.
카타르시스의 근원은 결국 가장 원초적인 곳에 존재한다.
고통과 슬픔은 느껴봤기 때문에 피하고 싶은 것인 것처럼
희열도 느껴봤기 때문에 알게 된 것.
나는 그 근원을 찾아서 무한 반복 재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마 안에 무엇을 담는가?
때로는 나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또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도 담는다.
오히려 사회 속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는 달리, 동물은 본능적이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좀 더 효과적으로 순수한 감정들을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그래서 동물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